5년전에 썼던 리포트. 오랫만에 읽어보니 재밌어서 올려본다. 이제와서 보니 참고문헌 표시가 아주 개판이다ㅇㅇ 이건 뭐 위키피디아를 인용하질 않나...ㅋㅋ



중국에서 소비된 식재료로서의 인육



머리말

다리달린 것은 책상 빼고는 못 먹는 게 없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국에는 엄청난 수의 요리가 수많은 재료를 사용해 만들어져 왔고 또 만들어지고 있다.

소고기를 넣어 만든 신선로식의 요리 후어꿔(火鍋), 만찬에 잘 등장하는 췌이피루주라는 이름의 새끼 돼지 통구이, 양고기보신탕 빠이주양러우(白煮羊肉)같이 우리들에게 친숙한 고기들에서부터 시작해서 비둘기고기를 잘게 썰어 다른 재료와 볶아내는 성차오루커, 바다제비의 침으로 만들어진 제비집을 이용한 탕옌워, 시웅즈앙이라는 이름의 곰발바닥찜도 있으며 희한한 재료로는 아주 잘 알려진 원숭이 골 요리, 꿀에 찍어먹는 살아있는 새끼 쥐요리에서 고양이, 천산갑, 오소리, 사슴새끼가 들어있는 자궁까지도 요리에 이용한다.

이렇게 상상도 못할 만치 광범위한 종류의 식재료들이 중국인들의 손에서 아름답고 맛있는 요리로 탈바꿈되어 나오는데, 나는 그런 수많은 요리재료들 중에서도 좀 특이한 요리재료에 시선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중국이 소재가 되는 옛날이야기 중에는 아주 맛있는 만두집에서 매일같이 만두를 먹던 사람이 하루는 자기의 만두에서 손톱이 나왔길래 주방을 훔쳐봤더니 그 집은 인육을 만두속으로 쓰는 곳이더라 하는 얘기가 있다. 형태는 좀 다를지 몰라도 중국인이 경영하는 맛있는 음식점이 알고 보니 인육을 쓰는 곳이었더라는 줄기를 사용한 이야기들은 상당히 많고 또 유명하기도 해서 그런 인육요리점을 소재로 한「팔선반점의 인육만두, 八仙飯店之人肉叉燒飽」나 우리나라의 「신장개업」같이 영화화까지 된 것들도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들은 과연 정말 이야기일 뿐이고 허구일 뿐이었을까. 구전되는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당시의 사회와 현실을 반영한다. 사실 지금이야 사람고기를 먹는다고 한다면 상당히 불쾌하고 혐오스럽게 받아들여지며 그런 식인풍습같은 건 미개한 식인종들이나 가진 나쁜 문화 아니냐 하고 얘기하겠지만 사실 식인은 중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행위이며 실제로 식인이 사라진 것은 근래 몇 십 년 내의 일로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완벽하게 다른 나라의 이야기도 아니다.

나는 이 식인에 대한 사례를 살펴보면서 식인이 옳다 나쁘다하는 가치판단보다는 좀 다른 측면인, 중국에서 소비된 식재료로서의 인육에 초점을 맞추어보려고 한다.

1. 카니발리즘으로서의 식인

(1) 중국에서의 사례들

중국의 이야기책에 보면 사람을 먹는 장면이 특별한 비유적 표현 없이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금병매」를 제외한 4대기서의 모든 책이 식인을 표현하고 있다

「삼국지」에서는 유비가 조조에게 쫓기게 되어 어떤 집에 투숙하게 됐는데 그 집 주인이 유비에게 헌상할 식료가 없어 자기 처를 죽이고 그 고기를 유비에게 헌상, 이에 감동한 유비는 그 후 그 집주인을 고관에 봉했다는 내용이 있다.

「수호전」의 경우 무송이 반금련을 죽인 죄로 귀양을 가는 도중에 어떤 주막집에서 털이 들어간 만두를 먹게 된다. 알고 보니 이것은 사람고기로 만든 만두로, 워낙 가난했던 주막집 부부가 음식을 만들 고기가 없어 지나가는 사람을 죽여서 만두로 만들어서 팔았던 것이다. 이능같은 경우, 가짜 자신을 죽인 후 그 집에서 밥을 차리려고 할 때 “아차, 내가 눈앞에 맛있는 고기를 두고도 잊어버릴 뻔 했군”하며 사체에서 고기를 잘라내 구워서 반찬으로 먹는다.

「서유기」의 삼장법사는 아기모양을 한 불로불사의 과육을 먹은 뒤(이것도 식인의 한 갈래를 암시하는 게 아닌가 생각되지만)로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요괴들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는다. 삼장법사뿐만 아니라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도 요괴들의 식인욕구에 내내 시달리는데 그 식인방법의 묘사도 상당히 구체적이다.

원나라 극중에「趙禮讓肥」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왕망 말년에 있었던 천하소란의 때에, 조효(趙孝)、조례(趙禮)라고하는 두 명의 형제가、난을 피해 산속에 숨어살며 모친에게 효행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동생 조례가、마무(馬武)라고 하는 도적에게 포획되었다. 마무는 자기 자신을、

某今在二這宜秋山虎頭寨一.落草爲寇.也是不得已而爲之.毎二一日一要喫二一副人心肝一.今日拿二住一頭牛一.欲待殺二壞他一.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잔인한 사람으로 이 조례를 요리해 먹으려고 했다. 동생의 불운을 알게 된 조효는 곧바로 마무를 찾아가 동생 대신이 되기로 자처한다. 이리하여 마무의 면전에서 두 형제는 서로가 먹히겠다고 다투고 철심장을 가진 마무도 둘의 우정에 감동해 둘 모두를 놓아준다. 결국 동한일통(東漢一統)의 세계가되자 마무는 천하병마대원수가 되어 그의 천거로 조효, 조례형제도 각각 출세한다는 것이 이 극의 줄거리이다.(『元曲選』第二十九册參看)이 조효, 조례의 묘는 지금도 직례성창평현(直隷省昌平縣) 서북쪽에 있는 현장구(賢莊口)에 있다고 한다(『光緒昌平州志』卷十)

그렇다면 식인은 서민들의 이야기에서의 묘사일 뿐일까. 중국왕조의 시작으로 보아도 좋을 하나라왕조에도 식인 고사가 있다.

하왕조의 후예는 병사를 이끌고 약정국을 침공하여 국왕인 백봉의 궁전에 들어갔다. 후예는 백봉궁 안의 재산을 탈취하고 백봉의 시체를 발기발기 찢어 육장(肉醬)을 만들어 하왕인 중강에게 바친다. 그 후 후예는 백봉의 어머니였던 현처와 신하 봉몽에게 살해당해 자신도 육장이 된다. 아들 예왕자는 놀라 궁전에서 도망치려 하나 위병에게 잡혀 살해된다. 하왕조는 아무래도 실증이 안 된 왕조이므로 이것은 이야기의 하나일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단순한 이야기고사의 수준을 넘어 실제 중국문헌에서는 식인 사례가 높은 빈도로 나타나고 있다.

식인행위가 많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에 대한 정리내용을 보면 대한제국(大漢帝國)이 건설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 멸망(1912년)까지의 2천 백여 년간 중국사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의 기록이 정사(正史, 국가가 편찬한 공식 역사서)에 기록된 것만 해도 무려 220여 차례나 된다.

중국의 정사란 「사기」를 비롯한 二十六史이고, 「자치통감」,「속자치통감」,「명통감」,「문헌통고」,「속문헌통고」등의 자료까지 모두 계산하면 더욱 많은 분량이 될 것이라 한다.

(2) 전 세계의 사례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던 대로 식인행위는 중국에 한정되어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일로 실제 카니발리즘(Cannibalism)이라는 학술용어로 정의된 한 연구의 분야로 분류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카니발리즘은 스페인어 Canibal이 어원으로서 Canib-는 당시 카리브족을 의미한다. 콜롬부스의 보고로 인해 당시 스페인사람들은 서인도제도에 사는 카리브족이 인육을 먹는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 카리브족의 카리브가 카니브로 변화한 이후, 카니발+ism 의 합성으로 생겨난 단어이다. 세계적으로 일어난 카니발리즘의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라틴아메리카

남미의 여러 원주민 종족은 몇 가지 유형의 식인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장례의 일부로서의 식인인데, 오리노코 강 상류의 촌락에 사는 구이아카족들의 매장 식인풍습이 그 좋은 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을 화장하고 남은 뼈를 조심스럽게 모아 절구에 넣고 간다. 장례식이 거행될 때 친척들은 이 가루를 국과 섞어 슬프게 한탄하면서 서로 나누고 마신다. 종족에 따라 죽은 사람의 신체 일부만 태워서 먹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재나 뼈를 먹는 것은 화장의 연장이었고, 일종의 제의였다.

둘째로, 인신공희(人身供犧) 의식으로서의 식인풍습이 있다. 이는 죽은 사람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지금부터 200∼300년 전만 해도 멕시코의 아즈텍 왕국에서는 전쟁 포로나 자국의 청년 남녀를 제단에 올려서 묶은 다음 희생자의 가슴을 열어젖히고 심장을 끄집어내는 풍습이 있었다. 캐나다의 휴런족에게도 포로를 밤새 괴롭힌 후 태양이 떠오르면 죽이는 희생의식이 있었는데 이는 전쟁과 태양의 신을 기쁘게 해 주려는 용도였다. 의식이 끝나면 죽은 포로의 몸을 놓고 인육잔치가 벌어진다. 유카탄반도에 거주하던 마야족에게는 제식으로서의 식인풍습이 있어 인육을 Long Pig로 불렀는데 브라질이나 콜롬비아 뽀빠얀에서도 이런 기록이 보이고 있다.

셋째로, 적개심의 고취와 적의 세력 약화를 위한 식인이었다.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식인종’들은 대부분 이런 유형이다. 이런 경우, 흔히 포로들은 죽기 전에 극심한 고문을 당하기 마련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죽인 포로의 시체를 먹음으로써 적에 대해 증오를 표출하고, 자기 부족에게는 ‘식량’을 제공하게 된다. 이런 경우, 두 번째와 비슷한 인신공희 성격이 가미되기도 한다.

*유럽

기독교에서 식인을 금지하고는 있지만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프랑스인들 침략자들이 식인을 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십자군 알베르 덱스와 라울 드 카엘 연대기를 인용하면 1차십자군 원정당시(1098년 12월) 마라트 안 누만에서 대량 학살이 일어났는데 안티오키아 공방전 당시 심각한 기근에 괴로워하던 십자군들이 이 마라트 안 누만에서 인육을 먹는 행위를 하였다고 한다.

"우리 십자군들은 투르크인과 사라센인(무슬림을 얕잡아 부르는 말)의 인육을 먹는 일은 물론 개조차 먹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알베르덱스-

"마라에서 우리들은 이교도(무슬림) 어른들을 커다란 솥에 넣어 삶았다. 또 그들의 아이들을 꼬챙이에 구워 불에 구웠다" -라울 드 카앵-

"마라에 주둔한 군대에 무시무시한 기근이 엄습하였던바 사라센인들의 시신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는 잔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마라시 지휘관이 로마교황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

이슬람의 역사가 이븐 할둔(Ibn Khaldūn)도 십자군이 인육을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세아니아

1768년 뉴질랜드에 상륙한 캡틴 쿡의 일기에 쓰여져있는 내용이다

「11월 24일 북쪽에서 태풍이 하루 종일 불어와 계획대로 전진하고자 하는 우리들을 방해했다. 오후에 몇 명의 선원이 원주민들과 놀기위해 상륙했다. 거기서 그들은 방금 죽인 젊은이들의 목과 장기가 모래밭에 굴러다니는 것을 보았다. 심장이 가장 커다란 카누 끝에 포크같이 생긴 것으로 꽃혀있었다. 선원 한명이 목을 주워들고 배로 돌아왔다. 배위에는 원주민 한명이 선원 전원과 탑승자 대부분이 보는 앞에서 인육을 먹어보였다」

파푸아뉴기니를 비롯한 주변 인도네시아 섬의 원주민들에게 식인 풍습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일본

에도시대 4대기근의 시기에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메이지3년, 형부성변관포고로 인체각부위의 밀매를 금한 공문서가 남아있다. 또한 태평양 전쟁 시 일본군은 각지에 식량보급이 두절되었었기 때문에 전사한 병사의 사체나 낙오된 병사를 비밀리에 죽여서 그 고기를 서로 빼앗아먹는 사태가 빈발하여, 군 상층부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이에 대해 1944년 12월 뉴기니전선의 일본군제18군은 「우군병사의 시체를 먹는 것을 금함」이라는 명령을 내려, 이를 어긴 4명이 처형되었으나 이 포고는 아사직전의 말단병사들에게는 오히려 생존수단으로서의 인육식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었다(적군장병의 사체를 먹는 행위를 금하는 기술은 없고, 필리핀의 민다나오 섬에서는 비전투원을 포함한 주민이 일본군병사에 의해 살해되어 먹힌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태평양전쟁시의 마샬제도에서는 일본인병사가 조선인군속을 죽여 고기를 먹은 사실이 판명되었기 때문에 지역촌장과 조선인군속이 궐기하여 일본군에 의해 전원 살해된 사건도 있었다. 또한 태평양 전쟁 시에 일어난 식인사건으로 ひかりごけ사건이 유명하며 전쟁이 끝난 평시에도 식인사건의 사례가 계속 났다.

*한국

한국에서는 부모님이 편찮으실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는 斷指, 割股가 유명하다. 신라 때 상덕이라는 자는 부모님이 병으로 고생하실 때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잘라 국을 끓여드렸다고 하는데 이 넓적다리 혹은 허벅지살의 소비사례는 상당히 많으며 숙종 22년 2월 5일의 숙종실록에서는 평안도의 한 백성이 사람고기를 먹었으나 임금은 그것이 몹시 굶주려서 실성했기 때문이라 판단, 특별히 사형을 감면하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후한서(後漢書)」제 69권 부분에서는 왕망(王莽)말기 천하가 어수선할 때 카니발리즘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고 적고 있고, 당나라 중화3년 황소라는 자의 군대는 사람들을 잡아먹었는데, 용마채라는 거대한 맷돌 수백기를 갖추고 사람들을 넣어 뼈와 함께 갈아 자신의 병사들에게 식용으로 공급했다고 한다(당서「唐書」). 아래는 자치통감에 실린 소란시에 있었던 인육소비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年代 「記事」

(1)唐僖宗中和二年(八八二)四月 「長安城中.斗米直三十緡.賊賣二人於官軍一以爲糧.官軍或執二山寨之民一(良民避亂入山築柵自保者)鬻之.人直數百緡.以二肥瘠一論價.」

(2)僖宗中和三年(八八三)六月 「時民間無二積聚一.{黄巣}賊掠人爲糧.生投二於碓磑一.併骨食之.號二給糧之處一.曰二舂磨寨一.」

(3)僖宗光啓三年(八八七)六月 「{揚州}城中乏食.樵採路絶.宣州軍始食人.」

(4)同年九月 「高駢在二{揚州城内}道院一.秦彦供給甚薄.左右無食.至下然二木像一.煮二束帶一食之.有中相啗者上.」

(5)同年十月 「楊行密圍二廣陵(揚州)一.且二半年一.城中無食.米斗直錢五十緡.草根木實皆盡.以二菫泥一爲食之.餓死者大半.宣{州}軍掠人.詣肆賣之.驅縛屠割.如二羊豕一.訖無二一聲一.積骸流血.滿二於坊市一.」

(6)僖宗文徳元年(八八八)二月 「{李}罕之.所部.不二耕稼一.專以二剽掠一爲貨.啗人爲糧.」

(7)昭宗龍紀元年(八八九)六月 「楊行密圍二宣州一.城中食盡.人相啗.」

(8)昭宗大順二年(八九一)四月 「{王}建陰令下東川將唐友通等.擒二{韋}昭度親吏駱保於行府門一.臠中食之上.」

(9)同年七月 「{孫儒}悉焚二揚州廬舍一.盡驅二丁壯及婦女一度江.殺二老弱一以充食.」

(10)昭宗景福二年(八九三)二月 「{李}克用逆二{王鎔軍}一.戰二於叱日嶺下一.大破之.斬首萬餘級.河東軍無食.脯二其尸一而啗之.」

(11)昭宗乾寧元年(八九四)五月 「王建攻二彭州一.城中人相食.」

(12)昭宗天復二年(九〇二)十一月 「是冬大雪.{鳳翔}城中食盡.凍餒死者.不可勝計.或臥未死.已爲二人所一※[咼-口].市中賣二人肉一.斤直錢百.犬肉直五百.{李}茂貞儲※[亻+待]亦竭.以二犬一供二御膳一.上鬻二御衣及小皇子衣於市一.以充用.」

(13)昭宜帝天祐三年(九〇六)九月 「軍築壘圍二滄州一.……城中食盡.丸土而食.或互相掠啖.」

(14)後梁太祖開平三年(九〇九)十二月 「劉守光圍二滄州一.……城中食盡.民食二菫泥一.軍士食人.……呂選二男女羸弱者一.飼以二麹麪一而烹之.以給二軍食一.謂二之宰殺務一.」

(15)太祖乾化元年(九一一)八月 「{劉}守光怒二{孫鶴之諫一己}.伏二諸質上一.令二軍士※[咼-口]而一之.」

(16)末帝貞明二年(九一六)九月 「晉人圍二貝州一踰年.……城中食盡.人爲糧.」

(17)末帝龍徳二年(九二二)九月 「鎭州食竭力盡.……{晉軍入城}執二{張}處瑾兄弟家人.及其黨高濛、李、齊儉一.送二行臺一.趙人皆請而食之.」

식인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카니발리즘론에서 들고 있는 일반적인 식인의 이유를 인육의 소비이유를 기준으로 재정리해 보았다.

1. 단순히 인육을 취득하고 그 영양분을 얻기 위함

가. 기아

1) 식량부족

2) 조난

나. 전시

1) 원정시 외딴곳에서 고립되었을 때

2) 공성전시 양식이 떨어져서

다. 미식(기호품)

2. 인육의 소비로 어떤 사회적 파급력을 창출하고자 하는 의도

가. 의식을 목적으로 한 식인

1) 제식으로서의 식인

2) 승리축제

3) 단체의 입문식

4) 추수제식

5) 장례제식

나. 주술적 식인

1) 죽은 자에 대한 애착에서 그의 혼을 이어받는 의미의 식인

2) 인육 혹은 피를 마시면 마법사 혹은 마녀가 될 수 있다는 마법적 믿음

3) 특정한 사람의 특정 부위를 먹으면 그 사람의 그 특징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

4) 약용, 질병치료

다. 자신의 마음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혹은 다수에의 전시효과(展示效果)를 노림

1) 충성

2) 형벌

3) 증오,

4) 효행

5) 위엄과시

6) 정신병

그런데 중국의 식인 경향은 다른(혹은 서양)권역에서 일어난 식인의 경향과는 좀 다른 형태를 보인다. 기아나 전시로 일어나는 식인은 일반적으로 문화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이 그 당시 당사자가 처한 상황의 급박함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권역별 구분이 의미 없다고 해석할 수 있겠으나 사회적 파급력을 창출하기 위한 의도로서의 식인을 보면 서양권역에서는 무언가의 의식을 목적으로 하는 식인이 많은데 반해 중국에서는 전시효과를 위한 식인의 사례가 많이 나타난다.

2. 실제 소비에 있어서의 특징

(1) 식재료로서의 인육

그리고 그것보다도 중국의 식인이 타권역의 식인과 훨씬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인육을 일반적인 식재료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백과사전에 비유할 수 있었던 당나라 도종의가 쓴 「철경록(輟耕錄)」이라는 책의 想肉이라는 항목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이 먹은 마른 남자와 여자는 요파화(饒把火)라 부르고 젊은 여자는 불미갱(不美羹)이라 한다. 어린아이를 일러 화골란(和骨爛)이라하고 이 모두를 통틀어 양각양(兩脚羊)이라 호칭한다.」

여기서 양각양이란 두 발을 가진 양의 의미로, 인간을 양처럼 식용하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화골란이란 뼈와 고기를 같이 구워서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럽다는 말이고 여자의 고기는 갱(국)에 어울리기 때문에 불미갱이라 하는데 계륵편이라는 책에는 下羹羊이라 적히고 있다. 요파화란 고기가 딱딱하여 연료를 많이 소모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철경록은 계속해서 사람을 요리하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사람을 요리하기 위해서는 산채로 솥안에 앉혀두고 밖에서 불을 때거나, 철시렁(鐵枷)에 걸치고 산채로 굽는다. 혹은 손발을 묶고 팔팔 끓는 물을 부은 뒤 대빗자루로 맛이 쓴 껍질은 벗겨 내거나, 혹은 자루에 담아 큰 냄비에 넣어 산 채로 찌는 수도 있으며 잘게 사시미를 만들어 소금에 찍어 먹는 경우도 있다. 남성인 경우는 두 다리를 자르고 여성인 경우는 두 유방을 도려내 먹는 것이 최고인데, 그 잔악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를 개괄적으로 일컬어 상육(想肉)이라 한다.」

송나라 장작(庄綽)이 쓴 계륵편(鷄肋編)에도 인육 소비사례를 서술하고 있는데 여기서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고기를 재료로 한 요리법을 정리해보면, 고기를 잘라 말린 뒤 잘게 썰어 양국(梁麴)과 소금을 섞어 미주(美酒)에 담근 육장(肉醬)을 해(醢)라고 하며 잘게 잘라 사시미처럼 날로 먹는 것은 연(臠) 또는 연육(臠肉)이라 한다. 생강(生姜)이나 육계(肉桂)를 곁들이지 않고 소금기만 하여 햇볕이나 불에 건조한 건육은 포(脯) 혹은 석(腊)이라 하고 얇게 저민 고기를 회(膾)라 한다. 그리고 불에 구운 고기를 자(炙), 오미(五味)를 곁들여 국을 끓인 것을 갱(羹)이라 하며 삶아먹는 것을 자식(煮食), 쪄먹는 것을 증식(蒸食)이라 하는데 실제 인육을 이 요리법에 적용한 사례는 매우 많다. 「한비자 難言編」, 「제왕세기」에 따르면 은나라의 대표적 폭군으로 잘 알려진 紂王은 자신에게 불행적(不行蹟)을 간한 신하를 나쁘게 보아, 익후를 자(炙), 귀후를 포(脯), 매백을 해(醢)로 만들었다. 또 주왕은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 경씨를 희롱하다 거절당하자 그녀를 해로 만들어 남편인 황비호에게 하사하여 먹게 하는데 황비호는 이에 격노,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제거하게 된다. 위에 언급한 여자고기의 호칭인 하갱양도 이 갱(羹)요리에서 나온 말이다. 송인이 송나라 문공을 죽인 남궁만이나 맹획을 해(醢)로 만든 사실이 「左傳」莊公12년 항목에 나타나고, 공자의 문하생인 자로가 위국(衛國)의 대부(大夫)인 공리(孔悝)의 행정관이었을 당시, 위국에서 일어난 부자간의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만다. 자로의 시체는 잘게 토막 내어져 해(醢)로 만들어졌고 사자에 의해 공자에게 보내진 일화는 유명하다(예기주소, 禮記註疏 6권)

재미있는 것은 중국에서는 이 인육이 미식(美食)의 목적으로 소비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패자였던 제나라 환공(桓公)은 호화로운 음식을 즐겼는데 일반적인 음식에 질린 환공이 자신의 부하인 역아(易牙)에게 새로운 요리를 요구하자 역아는 자신의 장남을 잡아 증육(蒸肉)을 만들어 바친다.

당나라 장족의 「조야첨재」에는 설진이란 인육애호가가 등장하는데 그의 일화는 다음과 같다.

「측천무후때 항주의 임안위에 설진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사람고기를 좋아했다. 한번은 그에게 돈을 빌려준 부부가 임안에 와 그의 집에 묵게 되었다. 설진은 그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먼저 남편을 살해한 뒤 수은을 넣고 시체를 달여 뼈까지 녹였다. 그 뒤 부인까지 상미(賞味)하려고 했으나 이를 눈치 챈 부인이 담을 넘어 탈출, 현지사에게 고소했다. 지사는 자세한 내용을 조사한 후에 설진을 송청(送廳)하여 백타(百打)의 형에 처했는데, 태사(笞死)했다.」

수나라말기의 인물인 주찬(朱粲)도 식인으로 유명하였는데 양제 말기에 종군하여 장백산의 산적을 징벌하고 그 후 무리를 모아 스스로 왕이라 칭한 뒤 회하를 건너 여러 군현을 공략했는데 이 때 가는 곳마다 살육을 감행하였다고 한다. 주찬은 패전하여 쫒길 때는 병사들에게 “이 세상에 사람고기만큼 맛있는 것이 또 있겠느냐, 걱정할 것 없다. 다른 나라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이 사람 아니냐”고 하면서 부인들과 어린아이들을 포획, 요리하여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외 인물로 독고장(獨孤莊), 당시대의 고찬이나 장무소, 절도사 이찬화, 송대의 왕언승, 황족 왕계훈, 대문학자 유개, 원의 흠주지사 임천지, 명나라 태조의 다섯째아들 주정왕의 아들인 유희, 조정 유력자였던 유택청, 여성 인육애호가 아농 등 수 많은 인육애호가들이 철경록, 빈퇴록, 문해피사, 자치통감, 야획편, 송사 문원전, 철위산총담, 명사 유택청전 등 수많은 사료들에 실려 있다. 장수나 정부고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적인데 이는 아마도 이들이 즐겨먹었던 내장이나 구하기 힘든 부위들은 대체적으로 비싸서 일반 서민들은 구입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라 본다.

이런 사료를 참고해 보았을 때 중국인들은 식인이란 행위를 죄악이라 보거나 터부시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요리의 하나이며 인육은 요리가 되는 식재료의 하나일 뿐이라는 인식이 부분적으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당나라 때는 나라 안에 인육시장까지 생겼다. 당말부터 오대 초기에 걸쳐 중국내 질서가 흐트러져 인육시장이 출현하였다는 사실이 「五代史記」,「資治通鑑」에 실려 있으며 아라비아 상인이 쓴 「중국-인도이야기」에서는 당시 상황을 아래와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다른 절도사를 토멸하면 반드시 그 소령(所領)을 합하고, 영토를 황폐화시키며, 주민을 모두 잡아먹었다. 중국의 법률은 인육을 먹는 것을 허락하고, 인육이 시장에서 공공연하게 판매되고 있다”

가격도 다른 고기에 비해 쌌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중국에서 쌀의 가격은 1두당 40전내지 50전이 보통으로 가장 쌌을 때는 두당 1전 이하일 때도 있으나(한서, 漢書 食貨志上)가장 비쌀 때는 두당 7~80만전까지도 올라갔다.(통감, 通鑑 梁紀十七、太清二年의 條)

이렇게 비쌌던 쌀 가격에 비교해보면

「사천성이 대기근으로 말미암아 민중이 서로 죽여 고기를 먹게 되었다. 부부나 부자가 서로 죽이고, 그 고기를 먹는 자도 있었다. (1644년 이래)3년 동안 천하대란이 일어나 민중이 이곳저곳으로 도망쳐 다니는 바람에 농사를 짓는 사람이 없어졌다...가정주(州)의 쌀은 1말에 20금, 성도 중경은 50금... 남자고기는 1근에 7전, 여자고기는 1근에 8전에 판매되고 있다...」(청대, 淸代,「客(氵+眞)術」)

「자치통감」천(天復) 2년의 항에는

「...시장에서는 인육이 거래되었는데, 1근에 1백전의 값이 매겨졌다. 개고기는 5백전이나 했다.」

당시 가난했던 민중으로서는 인육을 외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2) 인육의 맛

식도락으로서의 인육소비가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했는데 과연 인육은 얼마나 맛있었던 것일까.

기아의 극한에 도달한 상황에서 선택하게 되는 인육의 섭취는 고기 자체의 맛과는 관계없이 당시의 급박함으로 신경물질의 분비가 활발해져 허기를 채웠다는 포만감이 인육을 맛있었다고 느끼게 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 사례로는 인육의 맛을 유추하기는 힘들다.

「19세기 영국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었을 때 영국이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아프리카의 야생사자나 표범은 한 번 사람 고기를 먹게 되면 성격이 흉폭해지고 굶어죽을지언정 사람고기 이외의 것은 먹지 않으려고 한다. 수많은 관찰과 경험, 그리고 실험을 통해서 그 원인이 밝혀졌는데 사람고기가 다른 동물들에게 마약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 고기를 먹은 야생동물은 마약중독자처럼 사람 고기를 계속 먹지 않으면 금단증상 때문에 미쳐 날뛰는 것이다」

이 사례로도 인육이 맛이 있었기 때문인지, 단순히 인육속의 어떤 효소가 마약으로 작용해 맛에 관계없이 미치게 만든건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일단은 고기의 씹는 맛이 어떠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브라이언 마리나가 쓴 「카니발리즘」에는 런던에 온 뉴질랜드 마오리족이 한 얘기가 실려 있는데 거기에 따르면 인육은 돼지고기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한다. 또한 마오리족 중에는 50세 전후의 남자고기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아이나 여성의 고기가 가장 맛있고, 백인보다는 흑인의 고기가 더욱 맛있다고 한다. 앞에도 소개한 철경록을 봐도 어린아이와 여자의 고기는 부드러우며 남자와 노파의 고기는 질기고 딱딱하다고 서술되어 있다. 여자와 아이의 살이 남자나 늙은이에 비해 부드럽고 연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흑인의 살은 매우 부드럽고 탄력이 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고기가 먹을 때도 맛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인육은 과연 어떤 고기와 가장 비슷한 맛일까. 위에서 언급한 마오리족은 돼지와 비슷하다고 하고 있고 라틴아메리카지역 원주민들에게 인육은 긴 다리를 가진 돼지고기, 즉 Long Pig라고 불리웠으며 그 단어가 영어에 지금도 남아있기도 하지만 철경록에서는 전반적인 인육을 양각양이라는 말로 총칭하고 있다. 양각양이란 두발 달린 양이란 뜻인데 중국인들이 느낀 인육의 맛은 아무래도 양고기와 비슷했던 모양이다.

과연 인육은 어느 쪽에 더 비슷할까. 프랑스 파리에서 여자 친구를 살해하고 그 사체를 먹은 죄로 구속된 잇세이 사가와는 형무소에서 “여자의 고기는 양보다 맛있다”고 한 나카노 미요코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한다, “양보다 맛있다라... 나는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그 맛을 상상했습니다. 양, 양, 양... 그리고 하루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행동에 옮겼습니다. 인육을, 당신은 양고기 맛과 닮은 건 아닌가하고 상상하셨죠. 그건 일정부분은 맞습니다. 입에 넣었을 때 화끈거릴 정도로 뜨거움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에 와서는 단순한 착각이었던 느낌도 듭니다. 당신이 한 말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어서 그런 느낌을 들게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인육에 대한 당신의 뜨거운 마음에 대답하기 위해 나는 그 때의 맛을 어떻게든 전하고 싶다고 생각해 펜을 들었습니다. 어쨌든 간에, 그것은 강한 냄새도 맛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쇠고기에 가장 가까웠던 것 같긴 하지만, 이른바 고기의 맛 자체는 별로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가볍게 목을 넘어갔기 때문에 나는 마음속에서 어랏하고 외칠 정도였습니다“

동물이 가진 고기의 맛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그 동물이 먹는 먹이로,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의 고기 맛에는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초식동물의 고기는 씹는 맛이 좋으며 육식동물의 고기는 육식동물을 먹는 육식동물의 경우 씹히지도 않을 만큼 부드럽지만 냄새가 많이 나고, 초식동물을 먹는 육식동물의 고기는 상당히 질겨 잘 씹히지 않는다고 한다. 양과 사람의 식성은 명백히 다르고 아무래도 사람은 잡식성 식사를 하는 만큼 그 고기는 돼지고기나 혹은 개고기에 가까운 씹는 맛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실제로 유전과학쪽 뉴스를 보면 돼지의 유전자는 인간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실제 맛에 있어서도 돼지고기는 인간의 고기와 거의 유사한 맛을 내며 특히나 물에 삶는 방법으로 요리를 하게 되면 인간의 고기나 돼지의 고기나 맛의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유전자가 99%이상 일치한다고 하는 원숭이의 고기는 인육과의 맛 차이가 매우 심하다고 한다. 아주 작은 구성성분의 차이가 인육보다 진한 향을 내게 하면서도 싱겁게 만들어 인육과 같은 맛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개고기도 인육과 다른데, 인육과 달리 고기 자체에 위산에서 너무 쉽게 분해가 되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인육과 가장 비슷한 고기는 돼지고기인 것으로 보이며 일설에는 중국에서 돼지고기를 가장 많이 먹는 이유는 과거에 많이 소비했던 인육과 제일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미각적면에 있어서는 짭짤하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며 가끔씩 달짝지근하다는 경우가 보이기도 한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일화를 하나 소개하도록 한다.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귀신이 있었는데 그 귀신에게는 아이가 100명 있었다. 부처님이 그 아이 중 막내를 숨겨놓으니 귀신이 슬피 울며 아이를 찾아다녔다. 부처님은 귀신에게 “백 명의 아이 중 하나를 잃은 너도 이렇게 슬프다. 다른 사람들은 어떠하겠느냐”

라고해서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멈추게 했지만 귀신은 옛날부터 죽 사람을 먹어온지라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석류를 주며 그것이 인육의 맛과 비슷하니 먹으라고 했다고 한다.」

석류의 과육의 주요 성분은 당질(포도당. 과당)이 약 40%를 차지하며 유기산으로는 새콤한 맛을 내는 시트르산이 약 1.5% 들어있다. 수용성비타민(B1, B2, 나이아신)도 들어있으나 양은 적다. 단맛이 강한 감과와 신맛이 강한 산과로 나뉘며 전체적으로는 새콤달콤한 맛이 난다.(두산 엔싸이버 백과사전)

아무래도 사람의 혈액 속에 포함된 염분이 짭짤한 맛, 그 외 포함되어있는 다른 석류와 비슷한 영양소에서 달짝지근한 맛이 구현되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Marco Polo(Yule and Cordier; Vol. II, p. 225)에 의하면 건지방의 주민은 병사한 사람의 고기를 잘 먹는다고 한다. 그들은 살해당한 인간의 고기를 항상 찾아다니며 인육의 맛이 매우 좋다(Excellent)면서 먹는다고 한다.

사실 맛이 있다 없다하는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단정내리기 힘들고 미식으로 식인을 한 사람들의 사례에서도 감상을 언급하는 경우까지는 적고 있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결론을 내리긴 힘드나 어쨌든 인육은 최소한 ‘맛없지는 않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 같다.

(3) 약용으로서의 인육

그렇다면 약으로서의 효능은 어땠을까. 사람의 부위가 실제 약으로 쓰였던 사례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본다.

진장기는 본초습유에서 인육이 숙환에 지친 환자의 기력을 회시키는데 특효가 있다고 쓰고 있다. 五代의 조사관은 술자리에서 간을 즐겨먹으면서 “사람의 간을 먹으면 용감해지니 나에게 맞설 자가 있을 수 있겠느냐” 는 말을 한다. 호르몬을 촉진하는 힘이 있는 것일까. 일본에서는 한슨씨병을 고치기 위해 아이를 산으로 데려가서 죽이고 생간을 꺼냈다는 신문기사도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죽은 사람의 정신을 돌아오게하기위해 斷指를 하여 피를 먹이거나 특히 부모님이 아프실 때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국을 끓여드리는 경우가 많다. 이 넓적다리는 처음에는 매독 치료를 위해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전반적인 불치병에 널리 쓰이게 된다.

중국에도 사람이 약용으로 사용된 사례는 수없이 많다. 「신당서, 新唐書 孝友傳」에는 부모의 질병을 고치기위해 자신의 살을 벤 효자 삼형제가 실려 있다. 이후「송사, 宋史」의孝義傳、列女傳、「원사,元史」의孝友傳、列女傳、「명사,明史」의孝義傳、列女傳에서는 의료의 목적으로 사람을 식용한 예증이 많이 나타난다.

「주운손은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넓적다리 살을 잘라 죽을 쑤어드리고 정성껏 치료해 병을 낫게 했다. 그 후에 어머니가 또 병이 걸렸는데 그 때는 아내 유씨가 대신 넓적다리 살을 잘라 약이(藥餌)를 만들어 드리자 병이 나았다. 상서에서는 그녀의 효행을 칭찬하여 효부시를 지었다」(송사, 宋史 列女傳)

「강호가 16세 때 아버지가 병이 들어 피를 토했다. 그는 넓적다리 살을 떼어 아버지에게 먹여 병을 낫게 했다. 몇 년 후 아버지가 발에 질병이 생겼다. 동생 신은 넓적다리 살을 잘라 연약(煉藥)을 만들어 발라 병을 낫게 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아버지가 피를 토하자 신이 옆구리 살을 잘라 약을 만들어 치료했더니 나았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지는 또 큰 병으로 쓰러졌다. 강호는 다시 옆구리 살을 잘랐다. 그 뒤에 신이 병이 났는데 동생 일앙이 울면서 말했다. “형은 옆구리 살을 잘라 아버지의 병을 치료했는데, 설마 내 살로 형의 병을 고치지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도끼로 손가락을 잘라 피와 약을 조합하여 신에게 먹였다.

일문 사형제, 6대 모두 부모에 효도했다 하여 표창을 받았다」(청사, 淸史 孝義專)

중국에서 약용으로 사람을 사용한 역사는 대단히 깊다. 진한시대의 「五十二 病方」에서 인체의 9군데 부위를 치료에 사용한 기록이 있으며 이후 한대의 「神農本草經等」, 그 외에 「周易 參同契․卷上」에서 추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남북조시대 도홍경의 「名醫別錄」은 8가지 인체활용법을 수록하고 있으며 수당시대에 「新修本草」, 「千金要方」에 이르게 되면 22가지까지 늘어난다. 이후 중국의 이시진이라는 사람은 「본초습유」의 내용을 정리하여 사람의 각 부분을 35개소로 구분, 약용으로 쓰는 법을 정리한 내용을 「본초강목」의 제 52권 人部편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분류가 아주 상세해서 머리카락, 비듬, 귀지, 무릎때, 손톱, 이빨, 똥, 배내똥, 오줌, 상처의 딱지, 젖, 월경, 피, 정액, 침, 치석, 땀, 눈물, 수염, 음모, 뼈, 두개골, 피부, 양수, 탯줄, 쓸개, 인육, 미라에 이르고 있을 정도이다. 이는 중국의 인육소비가 단순한 식인에 그치지 않고 더 높은 수준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생각한다.

(4) 인육 소비의 부작용

그렇다면 과연 인육을 소비하는 행위에 수반되는 부작용은 없었을까.

인육에 관한 자료를 보다보면 한 번 인육을 먹으면 계속 먹고 싶어진다든지, 인육을 먹은 동물들이 이 후 인육만을 찾는 성향을 보인다든지 하는 중독적 성질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금기시 되는 인육을 먹는 쾌감이나 극도의 죄의식이 다시 인육을 찾게 한다는 정신적 면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 보다는 세로토닌의 작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극도의 스트레스 환경에서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한다고 한다. 이 물질은 콜레스테롤이나 중성지방을 합성하는 세포내의 소포체에 많이 함유되어 있는데, 스트레스로 인해 세로토닌이 다량 분비될 때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이 변형되고 이렇게 만들어진 고기를 PSE고기라고 한다. 이런 고기를 먹으면 신경전달 체계에도 장애가 나타나 자극에 대한 반응이 무뎌지고 질병에 대한 자각능력이 떨어질 수 있으며 쉽게 흥분하고 습관성이 강해져 정서적인 장애도 동반할 수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세로토닌이 많이 분비될 수 있는 상황에서 살해당한 사람의 고기를 먹었을 경우에 위에 언급한 중독적 성질이 나타날 수 있는게 아닐까 생각된다.

두 번째로는 프리온 단백질의 위험이 있다. 프리온 단백질의 설명을 보자

「프리온은 사람과 동물에서 정상적으로 존재하는 단백질이다. 우리 몸에는 프리온 단백질을 만들어내도록 명령하는 프리온 유전자가 있다. 이 단백질은 두 가지 모습을 하고 있다. 정상적으로 존재하는 프리온은 우리 몸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이들은 뇌 조직 따위와 같은 중추신경계에 주로 존재하고 있다. 정상 프리온은 130개의 아미노산이 결합해 꽈배기 모양의 나선 구조를 하고 있다. 핏속의 당을 조절하는 인슐린이 51개 아미노산, 핏속에서 산소를 나르는 헤모글로빈이 584개의 아미노산으로 각각 이루어져 있으므로 프리온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단백질은 대개 알파나선 구조를 하고 있는데 특이한 조건에서는 병풍을 펴놓은 듯 한 형태로 바뀐다. 단백질에게 형태는 매우 중요하다. 형태가 바뀌면 성질이 바뀐다. 프리온도 나선구조에서 병풍구조(베타시트)로 바뀌면 성질이 표변한다.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인 프로테아제의 공격에도 꿈쩍하지 않는다. 100도가 넘는 물에 넣고 아무리 오래 끓여도 형태와 성질이 바뀌지 않는다. 자외선이나 방사선을 쪼여도 자신의 모습과 성질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리고 감염성까지 지녀 정상 프리온에 달라붙어 나선 구조를 병풍구조로 바꾸어버린다. 그 결과 뇌·신경조직의 프리온 구조가 서서히 파괴돼 결국에는 뇌 조직에 구멍이 숭숭 나 해면체를 연상케 할 정도가 된다.」(2004.1.6 한겨레)

중요한 것은 사람을 포함한 포유류는 비슷한 포유류의 뇌를 생으로 먹게 되면 그 뇌 안에 있는 프리온단백질이 변형을 일으켜 그것을 먹은 사람 혹은 포유류의 뇌가 스펀지처럼 되어 미치는 병에 걸리게 되는데, 그 병은 가족성치사성신경증, 게르스트만 쉬트로이슬러 쟈인카증후군, 스크레피병, 전염성 해면양뇌증(TSE), 전달성밍크뇌증(TME), 광우병(BSE), 쿠루병등으로 나뉘며 이들을 총칭하여 프리온병이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도 사람의 뼈와 뇌수 등을 먹음으로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쿠루병(Kuru disease)이다. 파푸아뉴기니의 동부 고원 지대 포어족이라는 종족이 있는데 이들은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이 죽으면 장례를 치룰 때 그 가족이 죽은 사람의 두개골에서 뇌를 맨손으로 꺼내 이를 수프로 만들어 먹는다. 쿠루병은 이 뇌 스프를 먹고 몇 해 혹은 몇 십해가 지난 후 발병하는데, 병에 걸리면 괴질에 걸려 온몸을 떨고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여 웃음을 짓는 모습을 보이면서 죽어간다. 고기 자체보다는 뇌를 먹을 때에 프리온 단백질이 변형을 일으키는 까닭이다. 앞에 언급했던 황소의 난 때는 용마채라는 커다란 맷돌로 사람들을 뼈째로 갈아 병사들에게 식용으로 공급했었는데 이것을 먹은 병사들이 프리온병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맺음말

이따금씩 갓난아기로 국을 끓여 먹는 중국인의 사진이나 중국발 식인관련 소문이 돌곤 한다. 그 때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역시 짱깨는 무서운 놈들이라느니 하는 입방아가 찧어진다. 그렇지만 사실 사람을 먹는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돼지를 먹는 것이나 개고기를 먹는 것과 그렇게 많이 다를 것도 없지 않나 생각해본다. 이것은 인육을 대량으로 소비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니다. 인육은 사람에게 있어 완전식품이기는 하나 수많은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여 부족한 영양소를 상호 보충해줄 수 있는 인간들에게 완전식품으로서의 인육은 사실 그리 큰 의미는 갖지 못한다. 돼지처럼 한 개체에서 얻을 수 있는 고기가 그리 많지도 않고 맛이 특출나게 좋아보이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식재료로서의 인육은 그다지 큰 메리트를 갖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어차피 식용을 위한 재료가 수 없이 개발되었고 그 양도 풍족하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굳이 인육을 먹어야 할 까닭은 없다. 다만 사람을 먹었다는 행위를 행위자체로 보지 않고 무조건 야만인으로 치부해 버리는 색안경은 벗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사람이 행위하는데는 그에 따른 이유가 동반되며 사람이 사람을 먹었을 때는 그 나름의 이유가 존재한다. 개고기를 먹는데도 그 나름의 이유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노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도 가질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참고자료

중국의 식인문화, 황문웅

중화요리에 담긴 중국, 고광석

식인문화의 수수께끼, 한스 아스케나시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마빈 해리스

철경록, 도종의

계륵편, 장작

본초강목 52권 人部, 이시진

支那人間に於ける食人肉の風習, 桑原隲藏,:「桑原隲藏全集 第二卷」岩波書店

支那人の食人肉風習, 桑原隲藏:「桑原隲藏全集 第一卷 東洋史説苑」岩波書店

人肉食の基礎知識, 池田 雅典

人體藥物에 關한 硏究 -本草綱目 人部를 中心으로- ,박선동

일본 Wikipedia - Cannibalism항목

Security Akademeia - 人肉항목

네이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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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1 00:28 2012/12/1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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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통령 2015/01/02 15:26      

    ㅎ재밌게 읽었네요